요한복음 9장 부터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해설을 올립니다.
요한복음 09장 해설
13. 소경을 치유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9장 전체는 예수님이 “나면서 소경 된 자를 고치신 사실과 관련된 기록”입니다. 분량 상 두 번에 나누어 상고합니다. 또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이적이 여섯 번(1회 : 마 12:22, 막 3:22, 눅 11:4; 2회 : 마 9:28; 3회 : 마 15:30, 막 7:35; 4회 : 막 8:23; 5회는 본문; 6회 : 마 20:34, 막 10:52, 눅 18:42)인데, 본문의 사건은 사도 요한의 고유 기록입니다.
대지로 분류하면 ① 1~5절에서 “소경 된 이유를 묻는 대화”요, ② 6~7절은 “고쳐주심”이며, ③ 8~12절은 “눈뜬 자가 이웃에 나타남”이요, ④ 13~17절은 “바리새인들의 비판”이며, ⑤ 18~23절은 “유대인들이 그 부모에게 질문함”입니다.
1. 소경 된 이유를 묻는 대화(1~5절)
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길을 가실 때에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보시게 되었는데(1절), 2절에서 “제자들이 랍비여 이 사람의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죄 값으로 질병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마 9:5과 요 5:14에서 나타내신 바가 있으셨은즉 제자들은 그의 불구됨이 필시 자신(원죄의 뜻) 또는 부모의 죄 값(출 20:5)이려니 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엡 4:6).
2) 3절에서 예수님은 명확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로 소경 되게 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요 11:4의 “나사로가 죽은 것이 (그의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신 것과도 상통합니다. 인간은 다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지만, 그의 소경됨이 “죄 값으로 주신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럴만한 큰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모든 피조물을 자유롭게 이용하실 권세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용도에 따라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롬 9:21) 하나님은 미리부터 메시야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를 처음부터 소경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할 때, 성도는 어떤 불행한 환경을 만나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뜻을 알고 감사하며 거기에 부응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4절에서는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낮”은 핍박이 본격화되지 않은 시기를 의미합니다. 대개의 불법자들은 밤에 출몰합니다. 정의가 없는 시기를 어두움의 때로, 빛(진리)이 비취는 시기를 낮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이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5절) 하셨으니, 이는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를 뜻하신 것입니다. 어두움은 불의와 감추인 세계이고, 빛은 정의와 나타난 세계(참)를 뜻합니다.
2. “고쳐 주심”에 대한 말씀(6~7절)
1) 하나님의 하시는 일(예수님을 메시야로 나타내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나면서 소경 된 자를 예비하셨은즉(3절) 예수님은 그 섭리를 이루시는 분이므로 당연히 고쳐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세상의 빛이라” 하신 그 말씀이 소경에게는 “빛을 보게 하실 자”라는 뜻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소경에게 접근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병을 고쳐주시는 방법으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6~7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침과 진흙(그 장소의 흙)은 약이 아닐 것인데 왜 그것을 바르셨을까? 하는 것이 연구의 과제입니다. 또 “실로암 못도 약이 아닐진대 그 물에 씻는 것은 위생적 정결 이상의 뜻은 없을 것입니다. 침은 흙을 바르는 접촉제이고, 흙을 눈에 바르신 것은 물로 씻게 하시기 위함이며, 물은 가까운 곳의 실로암 못을 이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방법을 쓰신 이유는 그 소경이 믿음을 갖고 순종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볼 수 없고 물이 귀한 환경에서 그 소경의 모습은 초라하였을 것인즉 눈을 뜸과 동시에 깨끗이 씻어 변화될 것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시행하여 밝은 눈으로 왔으니, 세상을 처음 보았을 때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며(“실로아”라고도 함, 사 8:5),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작은 저수지입니다. 기드론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물을 저수한 수도시설의 일부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주위에 건물이 있고, 작은 수영장처럼 주위에 돌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소경이 이 물에 눈을 씻고 보게 된 것은, 마치 “나아만”이 요단강 물에 몸을 씻고 문둥병을 고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왕하 5:10).
3. 눈뜬 자가 이웃에 나타남(8~12절)
8절에서 이웃 사람들은 오래된 소경이고 걸인으로 알려진 사람이 밝은 눈으로 다닌 것을 보았을 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여 그 사람의 실체에 대한 의심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그 사람이라” 하는 이도 있고, “아니라” 하는 이도 있을 때에 당사자는 “내가 그로라” 하였고(9절), 10절에서 그들은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물었으며, 눈뜬 자는 11절에서 사실대로 말하였고, 그들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셨으므로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12절). 본 자들이 기이히 여긴 것과 눈뜬 자가 사실을 말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4. 바리새인들의 비판(13~17절)
1) 13~14절에서 저희(이웃 사람들)가 그 눈뜬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로 갔고,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신 일은 안식일이었으니 만큼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과 안식일 범한 문제를 관련하여 비판하려고 그 사람을 부른 것입니다.
2) 15~16절에서 눈뜬 자는 바리새인들에게도 사실대로 말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게 한 자가 안식일을 범한 것 보면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다.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 어찌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는 자들과 꼭 그렇게 단정하지 않는 자들로 나뉘어져 쟁론을 하게된즉
3) 다시 눈뜬 자에게 “너는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아느냐?” 하였을 때 “선지자로 안다”고 하였습니다(17절)
5. 유대인들이 눈뜬 자의 부모에 질문함(18~23절)
1) 18~21절에는 유대인들이 눈뜬 자의 보게 된 사실을 믿지 못하여 그 부모를 불러 그가 소경으로 난 것과 보게 된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들은 아들이 보게 된 사실에 대하여 경험자가 아니므로 직접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2) 그 부모들이 더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당사자에게 알아보게 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교파 단체에서 쫓아내는 것)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직접 “저에게 물어보시오” 한 것입니다(22~23절). 소경을 눈뜨게 하신 일에 대하여 긍정적 반응과 축하의 뜻이 없이 수사 대상을 삼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 세계에도 서로 뜻이 통하지 않으면 대립적 양상을 띠게 되는데, 여기에서 참된 종교는 교리도 확고하여야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 병행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4. 눈뜬 자를 2차로 소환함 (요 9:24~40)
이 본문의 제목을 “눈뜬 자를 2차로 소환함”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24~29절까지는 “소환자들과 눈뜬 자와의 대화”이고, ② 30~34절은 “눈뜬 자의 증언”이며, ③ 35~38절은 “예수님이 눈뜬 자를 믿게 하심”이요, ④ 39~40절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 소환자들과 눈뜬 자와의 대화(24~29절)
1) 24절에서 “저희가 소경되었던 자를 두 번째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저희”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권위로 소환한 것인데, 13절에서도 그를 데려오게 하여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른 이유는 눈뜬 자를 예수 믿는 자로 만들지 않으려는 것과, 바리새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마귀의 종으로 따돌리지 않으려는 논쟁파가 있었기 때문에(16절) 그들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여겨집니다. 그 이 는 바리새인들의 대화가 그렇게 나타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환되어온 눈뜬 자를 보자마자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너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하였으니, 여기의 “죄인”이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로 소경되었던 자가 복종하였는가?” 할 때 그렇지 않았습니다.
2) 25절에서 그가 대답하되 “나는 그가 죄인인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었다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말은 “누구를 정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눈을 뜸으로 삶의 보람을 찾은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3) 26절에서 그들은 또 묻기를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으며,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느냐?” 하였을 때, 눈뜬 자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한즉(27절), 28절에서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였으니 제자는 그 스승의 말만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율법)은 믿지만 이 사람(예수님)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29절)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증언과 이적의 능력을 믿지 않는 태도를 나타낸 것입니다(요 6:40~42, 9:3).
2. 눈뜬 자의 증언(30~34절)
1) 눈뜬 자는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을 답답하게 여긴 듯 합니다. 그리하여 30절에서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하니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 하셨는데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은즉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31~34절)고 한 것입니다.
2)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씀은 시 34:15, 17에 기록되었고,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시기에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할 것에 대한 말씀”이 사 29:18, 35:5~6에 예언되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 사실을 요한에게 보고하였던 것입니다(마 11:5, 눅 7:22). 눈뜬 자가 비록 소경으로 있었을지라도 그만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사실이 자기에게 응한 것을 체험한 만큼 사실대로 말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셨거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경건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이적을 나타낸 것인즉 그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24절)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3) 3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그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들의 오판에 대한 것을 반성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자존심 상한 자의 말처럼 “네가 죄 가운데 나서(시 51:5)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쫓아내어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3. 예수님이 눈뜬 자를 믿게 하심(35~38절)
1) 35절에서 예수님은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셨고, 그를 만나셔서 “네가 인자(예수님 자신에 대한 호칭)를 믿느냐?”고 하셨을 때, 35절에서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한즉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 하셨을 때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며 고백을 하였으니(38절), 그 눈뜬 자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한 분이 메시야일 줄로 알았지만, 직접 대면하여 확인하지 못한 것뿐인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확실한 믿음을 갖도록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적 체험은 믿음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확실한 믿음은 예수님을 보고, 또 알고 믿은 것이므로 이적 체험 자체와 믿음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39~40절)
1) 39절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은 아니나 그들에게 잘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하신다”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심판하신다”는 뜻은 마지막 때에 하실 심판을 미리 하신다는 뜻이 아니고(계 22:10~12), 참 믿음을 가진 자와 외식자에 대하여 구분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지 못한다”(마 7:2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하신 말씀(마 23:1~33),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마 22:12), “그물에 잡힌 고기를 선별하시는 일”(마 13:48) 등이 바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잘 믿는 자들 같고, 눈뜬 자는 34절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반대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일을 심판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심”은 바로 소경 같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뜻이요, “보는 자들을 소경 되게 하심”은 바리새인 같은 자들의 독선이 구원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40절에서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 중에 “우리도 소경인가?” 하면서 반성의 여지를 나타내기도 하였을 때, 41절에서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소경 되었더면” 하신 말씀은 차라리 나면서 소경 된 자의 형편이 되었더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형편이라면 정죄, 독선, 교만, 진리 비판 등 이단의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본다(잘 안다는 교만)고 하니 오히려 진리를 항거하는 불행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뜻에 대한 말씀은 마 11:25~27에도 나타나 있습니다.